2012 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선정
다산 탄신 250 년 기념
한국의 혼
다산이 서거한지 100년후 우리는 국권을 상실하고, 그후 또 80 여년이 흘렀어도
그가 염원했던 민생과 부국강병은 현재도 진행하고 있읍니다 .
다산 정약용이 살던 , 마재마을 ~ 정약용은 1762년 마재에서 태어나 15년을 살았다.
이후 성균관 유생시절과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을 때에도 마재마을을 수시로 다녔다 . 정조가 돌아가신 후인
1801 년 ( 순조 ) 강진으로 유배되어 돌아온후 , 또 18 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. 마재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때 외구들이
산의 정기를 누루기 위해 산 정상에 묻었던 무쇠로 만들었다는 철마에서 유래한다
정약용생가앞 주차장옆에 있는 연꽃 밭이다 . 생가에서 약 300 m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
한강가 가까운 위치이다 ( 조선시대에는 한강을 " 열 수 " 라 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
환갑이 되기 전까지 사용한 별호이기도 하다 . )
생가의 앞에는 비교적 세련되고 여유있는 식당 과 차집이 더러 있다 ( 차를 마실때 예를 말한 " 다도 "
의 처음 말을 만드신 분이 정약용 선생이시다 )
문화재 관리 와 정약용선생의 정신을 이어 받아 교육의 장으로 잘 하시고 있음에 감사를 드림니다
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27 - 1 ( 전화 031 579 6000 )
1777 년 ( 16 살 ) 성호 이익의 ( 성호 집 ) 을 읽고 실학자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. 1783 년 ( 22 살 )에
과거에 합격하여 정조임금을 만난다 . 정조는 정약용의 학문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매우 좋아한다 .
1784년 ( 23 살 ) 친구 이벽 과 서학 ( 서양학문 / 천주실의 )에 대해 토론하고 , 큰 충격을 받는다 .
1792 년 ( 31 살 ) 거중기를 이용하여 화성을 쌓으며 , 공사비 4만냥을 아껴 백서을의 칭송을 받는다.
1794년 ( 33 살 ) 경기도의 암행어사가 되어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탐관오리들을 잡아낸다 .
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 하고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를 전시
1801 년 ( 40 살 ) 신유박해 때 모함에 빠져 모진 고문을 받고 ,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을 간다
낮은 담 너머로 백성들을 바라본 다산의 동상
1801 ~ 1818 ( 40 ~ 57 살 ) 강진에서 귀양 생활 , 제자를 가르치고 , 학문을 연구 하며 , 국가 개혁을 주장하는
책을 펴낸다 ( 경세유표 / 국가의 통치기구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안을 담은 책이다 .. 털끝 하나도 병
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, 지금에 와서 고치지않으면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야 말것이다 .. ). 목민심서.흠흠심서
는 그의 대표 저서 이기도 하다 .
강진의 " 다산초당 " 을 가보면 그의 마음을 볼수있다 ~ 참으로 안타까운 세월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.
이당시 국가의 중심에서 국정을 운영하였다면 지금의
지금의 한반도 역사가 바뀌지 않았겠나.............
그가 서거한 지 100 년 후 , 우리는 국권을 상실하는 질곡의 역사를 겪으면서 중심에는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
민생 과 부국강병이 지금도 ~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
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선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와 꼿꼿하고 검소한 다산의 생활이 보존 되어 있다
1822 년 ( 61 살 ) 스스로 묘지명 (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글 )을 짖고 , 여유당집 500 권을 펴내다
이곳은 북한강 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" 두 미 " ~ " 두물머리 ", 두 큰물이 아우러지는 이곳은 실학의
회합이라는 운명과도 같으며, 강진 유배에서도 다산에게 소내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.
한강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발견합니다. 강진에서 온지 6년 , 결혼 30 년을 맞은 부인 홍씨에게서 온
붉은치마 ,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시 담는다 ...................
1836 년 ( 75 살 ) 결혼한지 60 년 되는 날에 고향 마재에서 눈을 감다 ...............
이백년 세월의 바람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
두 아들에게는 사대부로서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훈계했고 , 시집가는 딸에게는 집안의 화락을 기원
했으며 , 막내딸에게는 위로의 매화가지에 앉은 새로 담아낸다 ..
정약용은 1762 년 음력 6 월 16 일 사시 (10 ~ 11 시 ) 에 태어나 75세 이던 1836 년 음력 2 월 22 일 진시
( 8 ~ 9 시 )에 세상을 떠났고 . 그의 유언에 따라 집 뒷산에 장사 지냈으며 . 부인 풍산홍씨와 합장 한다 ..
사진 우측 뒷편에 있는 것이 정약용의 묘이다 ( 예의상 묘는 사진을찍지 않았읍니다 )
다산의 집 뒷편 " 묘 " 에서 바라본 넷째아들로 태어난 생가의 모습이다
당 호 는 여 유 당 ( 與 猶 堂 ) 이다
실학 박물관 ( 다산 문화재 : 매년 9월 말 에서 ~ 10 월초 / 9.30 ~ 10 . 2 다산에 관한 모든것 )
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, 천명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
불속에 처넣어 태워버러도 괜찮다 . 했던 그였읍니다 . 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그 꿈을
제대로 펴지 못하고 , 회갑을 넘어 스스로를 사암 이라 불렀듯이 후세를 기약할수밖에 없었읍니다.
실학은 조선후기의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대 유교경전의 재해석을 바탕으로
서양문물을 수용하여 조선후기의 개혁방향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. 임진외란 과 병자호란
으로 국가기능이 마비 되고 , 국토가 황폐화 되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학문은 여전히 농민들의
현실생활과 는 동떨어진 사장학이 아니면 주자학적 성리학이나 형식적 예학에 잠자고 있었다 .
이러한 학풍을 반성하고 국가의 총체적 개혁과 대외개방을 지향하려는 새로운 학풍이
일어 났으니 , 이것이 곧 실학이다 .
서계 박세당은 [ 색경 ] 이라는 농업에 관한 , 우리 농업환경에 맞추어 과수 , 원예 , 수리등 농사에
필요한 지식을 정리하여 풍토에 적합한 농법을 찿아 보급하려고 하였다 .
실사구시 Seeking truth from real facts
개 혁 Reform
실 용 Practical
실 중 Pragmatic
자아발견 Self - discovery
정약용
한반도의 고대의 역사로 부터 ~ 현대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인문학의 석학들이 많이 계시다 .
백성과 나라모두가 잘 살기를 바라며 저술하신 수많은 책에서 우리는 다른 말을 할수가 없다 ....
한사람이 생전에 1권의 책을 쓰기도 어려운데 ~ 천여권의 책을 쓴것은 땀이 아니고 , 피로 쓰신것이다 .
지금도 하늘나라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7 번째로 2050 클럽에 가입한 걸 아시고 기뻐하실것 같다 .
작년에는 유배지 전라남도 강진을 다녀온후 마음이 착찹하였다 , 생활하던 곳에서
내려보면 강진의 들판과 바다하구가 보인다 .유배지에서 18년을 내려보며 많은 책을 저술하고
남양주 마현에서 생을 마감하며 , 집뒤의 아주 작은 언덕에 묘도 소탈하게 하고 계시다.
14세기의 서양의 문예부흥과 맞먹는 사상 , 서양 문예부흥이 자기시대 문제해결의 길을
찿기위해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였다면 , 실학도 자기시대 문제해결
의 길을 찿기 위해 중국 ( 동아시아 ) 의 고전을 재해석 하려는 운동이었다 .
어린자녀가 있으시면 꼭 가보시기 를 권면하고 싶읍니다 ..
물 과 소금의 맛잇는 인생 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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